제18장 결론 - 환경정책의 한계와 새로운 도전

 

1. 환경정책의 변천 

 

        이 책의 첫 章에서 우리는 가렛 하딩의 공유의 비극을 소개하면서 환경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유로이 가축들을 방목할 수 있는 목초지이건, 땅이건, 물이건, 그것이 자신만의 소유가 아닌 모든 사람의 소유물인 경우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의사결정을 하게 되기 때문임을 보았다.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최선의 의사결정이 시스템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불합리한 결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분적인 합리성(partial rationality)이 전체적인 불합리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주장과 같은 맥을 형성한다. 물론 개개인의 양심과 도덕에 이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도 있겠으나 하딩에 의하면 양심과 도덕을 준수하는 자가 오히려 손해를 보는 사회구조하에서 양심과 도덕에의 호소는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같이 멸망하는 공멸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동의된 강제”가 필요함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동의된 강제”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해지고 행해질 때 그것이 곧 환경규제정책이 됨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환경규제정책은 이 정책의 구조적인 특성상 피규제자들로부터 부당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환경규제정책은 경제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유발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오염저감의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여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이며, 환경오염의 억제와 정화를 위한 청정기술을 발전시키려는 유인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문제점들이 노정되었다. 또, 피규제자들이 규제를 스스로 준수하려는 유인이 결여되어 자발적인 규제준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환경규제정책의 큰 문제점중의 한가지였다. 

        이러한 명령-강제방식 규제정책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새로이 제안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경제적 유인책이었다. 환경세나 배출권거래제도를 통하여 오염을 발생시키는 피규제자들이 오염을 억제하거나 줄인 양만큼 그들에게 시장원리에 입각한 경제적 이익이 돌아가도록 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오염을 억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적유인책은 우선 자발적인 오염억제 노력을 유도하고 청정기술의 개발을 위한 유인을 제공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라는 점에서 명령-강제방식의 환경규제정책보다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사실 환경정책의 새로운 경향은 명령-강제방식의 환경규제정책에서 경제적 유인책의 보다 적극적인 도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유인책도 만병통치약은 아니었다. 돈으로 오염시킬 권리를 살 수 있게 하는 제도라는 근본적인 문제점과, 각 오염원으로부터의 오염물질의 배출량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술적인 문제들이 이 제도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하여 해결되어야 할 선행과제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유인책의 무엇보다도 큰 한계점은 이 방식 역시 명령-강제방식의 환경정책과 더불어 사전적이고 예방적인 정책수단이라기 보다는 사후적인 환경정책이라는 점이다. 환경오염을 아예 발생하지 않도록 하거나 애초에 최소로 줄이려는 노력이 이미 오염된 환경을 되살리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래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 소위 환경영향평가(EIA)와 전략환경영향평가(SEA)등이다. 환경영향평가는 시행될 단위 프로젝트가 환경에 미칠 영향을 사전에 점검하여 환경파괴를 최소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전략환경영향평가는 단위 프로젝트가 아니라 정책과 계획의 수립단계에서 환경파괴적인 요소들을 사전에 조정하거나 제거함으로서 환경파괴를 보다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정책수단으로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인 예방정책수단에서조차 우리는 환경정책의 한계를 보게 된다.

 

2. 환경정책의 한계

 

        이상에서 살펴본 환경정책들은 모두가 환경파괴를 최소화하거나 환경보전에 주안을 둔 것이었다. 다시말하면 지금까지의 환경정책은 오염의 억제에 급급하였지 쾌적한 삶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창조해 나간다는 의미에서의 “환경창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각종 환경정책들이 기반해 온 근본적인 視角들이 재정립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

        가렛하딩이 지적한 “공유의 비극”이 기초하고 있는 人間觀은 인간은 타인을 생각하기에 앞서 우선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며, 이러한 인간은 외부의 강제로 적절히 통제되어질 때 전체의 발전을 위한 조화로운 행동으로 유도된다고 보았다. 또 일방적인 외부의 통제가 피규제자들 스스로의 규제준수를 유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경제적 유인을 주고자 하였다. 사람은 경제적 이익에 의하여 움직여진다는 인간관이다. 이러한 시각 어디에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와 걱정, 그리고 이타주의적 인간관은 존재하지 않으며 더더구나 공동체의 개념은 보이지 않는다. 또 사후적이며 소극적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창조해 나가는 적극적인 인간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정말 타인에 대한 한점의 배려없이 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행동하는가? 또 인간은 도덕이나 사회적 윤리에 영향받지 않고 정말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어야만 움직여 왔던가? 인간관에 대한 이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이 외부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며 책임을 지기 싫어 한다는 인간관은 소위 X 이론의 인간관으로 대표되는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인간관이었다(Taylor,1967). 그러나 이에 대칭되는 Y 이론에 입각한 인간관이 제시된지는 이미 오래이며 여기서는 사람은 외부의 통제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동기에 의하여 움직이며 소극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책임을 즐겨 맡으려는 적극적인 인간관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인간관에 입각하면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중앙집중적인 의사결정과 엄격한 외부통제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개개인으로 하여금 의사결정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하며, 문제해결의 창의성을 방해하는 각종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달성을 위한 중요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제시된다(McGregor,1957:256-262; Chandler and Plano,1982:124-125).

        세계각국의 환경정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영국과 미국의 환경정책 스타일이 ‘강압을 통한 강제’(enforcement through coercion)와 ‘협조와 타협을 통한 강제’(enforcement through cooperation)라는 양극단을 각기 대표하는 판이한 유형이라는 것을 보았다. 철저한 견제와 불신, 그리고 경제적 유인의 관점에 입각한 환경정책이 미국식이었다면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협조가 그나마 근본적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영국식 환경정책의 형태였다. 물론 어느 나라의 환경정책 스타일이 환경보전에 효과적이었는지에는 많은 논란이 있겠으나 David Vogel은 두나라 환경정책의 효과는 대동소이하다고 결론짓고 있었다. 피규제자의 막대한 저항과 비용을 유발한 융통성없이 엄격한 미국식 환경정책과, 피규제자들과의 합의와 타협에 바탕을 둔 융통성있는 영국식 환경정책의 효과가 비슷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 환경정책의 스타일에서도 우리는 적극적인 인간관에 대한 요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환경정책은 -비단 환경정책뿐만은 아니지만- 너무나 오랜기간을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인간관에 기초하여 시행되어 왔으며 이제 이러한 환경정책은 보다 적극적인 인간관을 기초로 전개되어야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벌써 시작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3. 환경정책의 새로운 도전

 

        새로운 인간관에 기초한 새로운 환경정책 유형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제IV편에서 살펴본 지방의제21의 형성을 둘러싼 최근 국제적인 환경논의의 동향과 각국 도시정부들의 행태라 볼 수 있다. 지방의제21은 지역의 환경보존을 위하여 지역공동체가 하나가 되어 밑에서 부터 작성한 구체적인 환경행동프로그램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의 개념이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환경적으로 건전한 공동체의 창조를 위하여 지역주민 개개인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가 어디에서 보다도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환경정책이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할 점은 어떻게 하면 지역단체와 지역주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동원하여 자발적으로 지역공동체의 환경창조에 앞장서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선은 지역주민이나 지역단체가 그 지역의 환경창조에 공헌하고자 할 때 무엇이 그러한 욕구와 동기를 가로막고 있는가를 살펴 장애요인들을 제거하고, 그 다음으로는 환경창조를 위한 주민 개개인들의 에너지를 강화시키고 결집시키는 일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환경정책의 주된 관심이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를 규제함으로써 환경보존을 달성할 수 있다는 관점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사회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을 보다 쾌적한 공간으로 창조해 나가기 위해 그 지역주민들이 직접 그 지역의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환경창조의 관점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지역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종 지역단체들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마련이다. 지방의제21은 지방자치단체, 청년단체, 여성단체, 과학자, 농부, 기업, 노조, 원주민, 환경단체등 9개 주요 그룹에 의하여 동등하고 평등한 참여와 책임을 지는 상태에서 형성되고 집행되어 지도록 하고 있다. 과거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되던 공동체의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그룹들이 동등한 중심체가 되는 공동체의 개념에 의하여 진행된다는 것이다(김귀곤,1995:33).

        이렇게 되면 환경단체도 이제는 감시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환경창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 요구된다. 사실 전형적인 환경규제정책과정에서 환경단체들이 차지하는 위치는 견제자와 감시자로서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규제정책과정에서 비용을 집중적으로 부담하게 되는 피규제자들이 정책을 무력화시키거나 정책강도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끊임없는 로비를 전개하게 되고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규제기관이 피규제자들에게 포획된다는 포획이론은 환경규제정책에 있어서 시민단체의 역할이 기본적으로 정부와 기업에 대한 감시자로서 그리고 견제자와 균형자로서의 역할이 가장 중요함을 역설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이론이라 보겠다. 미국에서 시민소송제도 도입의 근본적인 취지 역시 경제단체에 비교하여 열악한 입장에 처해 있는 시민단체에게 행정기관이 환경법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거나 피규제자가 환경법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 경우 이들 시민단체들에게 소송권을 부여함으로써 피규제자들의 부당한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규제기관의 포획현상을 최대한 억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었다(문태훈­박흥식,1995; 문태훈, 1995;   Melnick,1983:9). 그러나 환경정책이 환경창조를 최우선의 목표로 해 나갈 때 시민단체의 역할은 재정립되어야 한다. 감시자와 견제자로서의 주된 역할에서 이제 그 활동의 중점이 지역환경창조를 위한 적극적인 참여자로, 선구자로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환경창조를 위한 정책과 주민참여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환경정책과 주민참여가 자연을 자연의 입장에서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환경정책의 바탕이 인간의 삶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외경심과 자연속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고귀함을 존중하는 생명존중의 사상에 그 바탕을 두어야 함을 의미한다. 각종 환경정책은 물론 환경운동의 근본이 생명존중에 입각해야 됨을 박경리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샤머니즘의 전통과 문화속에 살고 있던 우리민족은 점차 물질문명과 합리주의의 흐름속에서 분명한 것들만을 추구하게 되고 불분명하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것들은 그 가지들을 잘라서 버리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분명한 것들과 합리적인 것들만 추구하는 삶의 양식은 결국 자연과 생명에 대한 우리의 풍부한 상상력을 축소시켜온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러한 상상력의 축소는 곧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동시에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포기의 꽃에도 신비롭고 소중한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안 까닭에 상여를 장식하던 꽃은 모두 종이꽃이었으며 절간을 장식하는 꽃도 모두 종이꽃이며, 한 마리의 곤충이라 할지라도 신비로움을 간직한 동등한 생명체로 보았기에 함부로 해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많은 환경정책이 행해지고 있고 많은 환경운동이 행해지고 있지만 이 환경정책이나 환경운동이 진정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되려면 인간을 위한 정책과 운동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의 고귀함과 신비스러움을 존중하기 위한 것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지만 현실을 만들어 나가는 힘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인간의 모든 동기를 이익추구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자연히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거나 유인할 수 있는 외부적인 조건들의 강화에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노력하게 된다.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규제정책과 경제적 유인책에 거의 절대적으로 의존해온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공리주의와 개인주의에 기반을 두며 발전해 온 자유주의적 서양식 사고방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찌기 탈콧 파슨즈는 서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 이론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이윤희역,1993:32-46).

        인간은 주어진 상황속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속에서 인간의 행동은 대부분 목표를 추구하면서 일어나게 되고 모든 목표의 추구는 그 근본에 있어서 규범적 고려, 즉 이상적 기준과 기대감에 의하여 인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핵심인 공리주의를 이끄는 규범이 항상 절대적인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공리주의에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바로 행위의 외적 조건들이며 규범적 고려가 아니게 된다. 이는 인간의 주관적인 가치가 효율적인지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적인 상황조건에 대한 적응만이 행위자의 유일한 문제가 되며 더 이상 행위의 주관적인 측면, 즉 규범에 의한 인도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게 된다고 보았다. 만일 인간의 행위에 주관적인 행위주도 능력과 노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이러한 개인행위의 집합적인 표현인 조화로운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근원은 외적, 조건적 구조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오로지 강제나 보상을 통해서만이 개인적 행위들을 통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주의 사상의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 가장 외부로부터의 간섭을 싫어하는 자유주의가 역설적으로 외적규율을 가장 많이 요구하게 되는 근본적인 속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끊임없는 규제와 유인의 제공만이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가당착에 빠져 들게된다.

        그러나 내적규범의 인도에 의한 인간행위자의 역할, 윤리적 기준들은 회복될 수 있으며 확산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은 잊혀져가고 있으나 이러한 소중한 가치들을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녀왔기 때문이다. 자연이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관리하고 정복해 나간다는 입장이 아니라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고 늘 자연과 조화로운 생활을 영위해 온 우리 선조들의 삶의 모습과 사상에서 우리는 그러한 가치들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박경리씨가 설명하는 우리민족이 은연중에 지녀왔던 생명존중 사상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부끄럽지만 우리의 것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했고 과문한 필자의 입장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은 우리에게 문화유적으로 남겨진 선현들의 조형물들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 사실 우리민족에게 자연은 만물을 생성하는 가장 순수한 이상이었다. 그러기에 자연공간 속에 인공의 구조물을 조영한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인공적 조영물을 속된 것으로 생각하여 모든 것을 자연에 잘 동화시키려는 원칙하에서 자연의 순리를 조영의 원리로 삼았던 것이다. 지형을 존중하여 자연을 허물지 않았고 토질을 변질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 습지면 습지에 잘 사는 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거나 계간을 조성했다. 보도는 지세를 따라 설치하여 자연에 잘 동화되게 만들었고 배수구나 계단은 무리하게 설치하지 않았다(정재훈,1996). 이러한 자연관은 동산과 숲의 자연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과 정자를 배치한 우리나라의 원림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유홍준,1993:273-308). 산 턱밑에 고층아파트를 지어대고 농촌의 논 한가운데 고층아파트를 짓는 지금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최근에 건축분야에서는 생태건축(환경공생형주택 혹은 환경건축)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생태건축의 기본아이디어는 건축물을 자연생태계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한 건축설계는 인간이 자연생태계의 구성요소라는 인식하에 지탱가능성을 목표로 하여 생물학적 다양성과 환경적 통합성을 유지한다는 설계이념으로 도시설계, 단지설계, 조경설계, 건축설계, 실내디자인, 제품설계 등의 설계가 친환경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설계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러한 지탱가능한 설계를 위해서는 첫째, 환경영향을 최소화하는 설계, 둘째, 에너지절약 및 재생가능한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는 설계, 셋째, 물질순환을 활성화하는 설계, 넷째, 자연생태계를 회복하는 설계, 다섯째, 인간과 자연이 공생할 수 있는 설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양병이,1995:164). 그러나 이러한 자연생태계의 일부로서의 건축물은 이미 우리 선조들의 건축관과 자연관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이중환(1690-1752)은 택리지 복거총론에서 살기좋은 곳의 한가지 조건으로 산수를 들면서 집근처에 유람할 산수가 없으면 정서를 함양할 수 없다 하였고, 부득이한 경우 십리 거리나 반나절 거리에 산수 좋은 곳을 마음 내키는 대로 찾아 시름을 풀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이중환저,이익성역,1996).

        또,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문화는 자원을 철저히 아끼고 재활용하며 환경오염을 최소화하도록 생태학적으로 짜여져 있었다고 한다. 가정생활에서 버리는 쓰레기가 생기지 않도록 집집마다 마당을 두어 가축을 기르고 텃밭을 집 가까이에 두었다. 그래서 음식찌꺼기는 가축에 먹이는 사료였고 재나 분뇨는 농지에 비료로 이용되었으며 그밖의 거의 모든 자원이 재활용되었다. 19세기 말에 우리나라에 와서 살아야 했던 외국인들은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서 외국인들 끼리 한성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해야만 했다고 한다. 필요한 땔감은 산림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인근지역으로부터 반입되었다고 한다. 집을 짓거나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산림을 훼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송목금벌이 강조되었고 소나무 숲을 보존하는데 힘썼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주택구조도 목재를 과다하게 소비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집자체가 목재를 최소한으로만 사용하고 있고 온돌이라는 것도 아침저녁으로 취사만 하면 자동으로 난방이 되기 때문에 땔감으로 나무를 많이 쓸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환경파괴와 오염에 대해서는 단호한 벌을 가하고 있었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지금도 시골에서 발견되는 돌판에 “棄灰者 杖三十, 棄糞者 杖五十”, 즉, 재를 버리는자는 곤장 30대, 똥을 버리는 자는 곤장 50대라는 글귀가 발견된다. 이들이 다 유용한 거름자원인데 이 자원을 낭비하고 강이나 길에 버려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축을 방목하여 산림을 훼손하는 행위도 곤장100대에 해당할 만큼 엄한 벌로 다스려졌었다. 소나무 한그루를 불법으로 베어내면 곤장 100대, 두그루이면 곤장 100대를 친후에 군복무를 시키고, 열그루면 곤장 100대를 친후 오랑캐지역으로 추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일제시대 이전까지만 하여도 ‘나무가 많아서 홍수와 가뭄이 없고 물좋고 땅이 비옥하여 낙원 같은 나라’ 로 알려졌었다고 한다(김정욱,1994:285-287).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이타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꺼이 타인을 위해 봉사할 수 있으며 타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여전히 주변에서 많이 목격할 수 있고, 자발적인 봉사활동 역시 주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더구나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인간은 외부의 통제에 의해서만 소극적으로 마지 못해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즐겨 책임을 맡으려는 적극적인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렛 하딩이 포기했던 내면적규범에 의하여 인도되며, 자발적 참여의식으로 무장한 지역주민들에게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한 새로운 희망을 거는 것이다. 그러나 파슨즈의 주장대로 단순한 윤리성의 강조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내적규범에 인도될 수 있는 인간의 주관성과 사회적인 규범을 위협하지 않는 사회구조를 인정하고 형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지금까지 너무나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는 모든것들로 부터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급박한 과제이다. 환경문제는 우리의 생존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